바래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호통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우리는 그렇게 호통치는 것과는 별로 친근하지 않다.

예수님이 속이 좁아서 바리새인들을 관용하지 못한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 분노는 하나님의 정의로부터 왔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거룩한 분노와, 그냥 감정적인 분노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무조건 자기 맘에 안든다고 분노하는 것과는 엄연히 구분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성전에서 장사꾼들의 행위와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태는 예수님께서 참을 수 없는 불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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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범죄가 특별한 범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즉슨, 살인과 강도와 같은 형사적 중범죄가 아닌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호통을 기억해야한다. 나에게는 그러 범죄가 해당되지 않는다고 교만할 수 없다.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상업적 이익을 취득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항상 남들에게 날카로운 화살을 겨누는 소위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들끓고 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전도사라고, 목사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외줄타기와 같다. 한시라도 경계를 늦추면 줄 밑으로 추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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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구절 중 바리새인들을 보고 눈먼 인도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데

눈먼 사람들이 눈먼 사람들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어쩌면 눈먼 지도자들이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교회의 본질은 사라지고 종교 행위만 남은 안타까운 현실에 예수님께서 탄식하고 계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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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너무나 높은 기준을 적용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우리로써 그런 범죄를 피할 수 있을까?

근심하여 돌아간 부자 청년을 보며 어떤 제자가 질문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겠냐고,,,

사람으로서 불가능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예수님의 답변이 기억난다.

그렇다. 우리의 모든 행위 속에 있는 잠재적 범죄 가능성을 늘 염두에두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방법밖에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볼 때 우리는  갖가지 이유로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한계이다. 영적인 파산상태에 이르른 것이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 대속의 사건을 기억하며 구원의 감격으로 하루 하루 버텨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결국 우리 존재의 가치가 완성되는 순간은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밖에는 없다.

가장 낮아질 때 높아지는 것처럼, 완전한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준다.

이 믿음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환경과 처지를 공감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며 인도해주시리라는 확신과 신뢰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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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듯이.... 하나님께 내 삶을 의지하고,, 은혜를 구하는 삶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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